제목:「대국산성」 축성에 관한 역사적 사실 정밀 조사 요망
군민 복리 증진을 위하여 불철주야 헌신하시는 군수님과 남해군 공무원 여러분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고현면과 설천면에 걸쳐 위치하고 있는 대국산성 축성에 관한 역사적 사실에 관한 사료가 발생되었기에 이에
관한 남해군의 정밀 조사를 의뢰 합니다.
먼저,대국산성에 내려오고 있는 전설 중 하나인 “천장군과 일곱 시녀”에 등장하는 천장군은 전설상의 인물이 아닌 실존 인물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2020.10.30.일 남해군청 자유게시판에 기고자 천택호님으로부터 「문의 합니다」라는 제목하에 다음과 같은 문의를 해 오셨습니다.
“국사 편찬위원회에서 남해군 서면 유우석씨 소장 자료를 보고 궁금한 사항을 알아 보려고 하는데 남해문화원 홈페이지도 없고 통화도 안되어 여기에 질문을 드립니다.
남향보존회라는 단체가 있는지 여부,첨부가 된 축문의 출처가 궁금하여 자세한 내용을 문의 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세요
(첨부:축문 사진 1부)"
위 축문 원문의 형태 및 번역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維歲次戊午三月庚子朔二十三日壬戌 獻官幼學 敢昭告于千萬里將軍思庵花山君 壬辰倭亂之時 從天將李如松 來同救國 累載成功 封君花山 水軍都摠忠武公識公妙術 使勸築城 公以一鞭驅石山頂 一朝成功 仰想奇蹟景遺南海 永世不虧 義合追慕 昔歲奠享 年久歲深 闕享有載 今玆南鄕保存會 成復舊享儀 謹以淸酌香果庶品式陳 伏惟英靈庶幾鑑饗
무오년 3월(경자) 23일(임술) 헌관 유학 ○○○는 감히 천만리(千萬里) 장군 사암(思庵) 화산군(花山君)에게 밝게 고합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을 따라 함께 오셔서 우리나라를 구제하셨으며, 여러 해 동안 전공을 이루어 화산군에
봉해지셨습니다. 수군(水軍) 도총관(都摠官) 충무공(忠武公)께서 공의 신묘한 술법을 알아 성곽을 축조하도록 권면하셨습니다. 공은 채찍 하나 들고 말을 몰아 석산(石山)의 꼭대기에 오르셨고, 하루아침 만에 공적을 이루셨습니다.
우러러 생각하건대, 기이한 행적과 경관이 남해에 남아 영원토록 보전될 것입니다. 의리가 추모하는 데에 합당하여 옛날에는 향사를 올렸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 향사를 그만둔 지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지금 남향보존회에서 옛날의 향사 의식을 회복하고, 맑은 술과 향기로운 과일들을 삼가 진설하오니, 영령께서는 흠향해주시길 바랍니다.
위 축문에 의하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요청으로 천만리 장군이 산성을 축성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천만리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행정총괄사령관이신 천장 이여송 장군과 함께 총독장 및 조병영량사,즉 전투사령관 겸 군수사령관으로 전쟁에 참전하셨으며 평양,곽산,울산,동래 전투 등 에서 큰 공을 세워 화산군에 봉해 졌으며 후에 충장공 시호를 받게 됩니다.
천 장군은 북방 이민족과의 수 많은 전투에서 축성의 중요성을 깨닫고 당시 축성의 대가로
인정 받으셨다고 조상님들로부터 전해 들은 바가 있습니다.
따라서 전략상 중요 요충지인 남해의 대국산에 산성을 쌓아 외적의 경계 및 침입에 대비코자
했던게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충장공 화산군 천만리 장군의 16세손으로 남해에 들어 온지는 20년이 조금 넘습니다.
제가 남해에 거주하면서 가장 의문을 가졌던 것이 대국산성에 하필이면 희귀 성씨인 천씨 성을 가진 장군의 전설이 남아 있을까?였습니다.
그런던 중 남해군청의 자유게시판의 축문을 보고 나서는 대국산성에 남아 있는 천 장군의 전설은 전설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만약 축문의 내용이 정밀 조사 결과 사실로 밝혀지면 대국산성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들을 제대로 정립해야 할 것 같습니다.
첫째,정확한 명칭 표기입니다.대국산성의 국자가 해동지도에는 나라 국(國)으로 표기 되어 있는데 언제부터 인가 판 국(局)으로 바뀌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천만리 장군은 명나라 즉 당시 대국(大國)출신 이기에 산성을 축성하고 나서 대국산성(大國山城)으로 명명하였다고 사료 됩니다.
따라서 현재의 판 국을 나라 국으로 바로 잡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축성 시기입니다.
현재 축성 시기를 삼국시대로 추정하고 있습니다만 축문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조선 중기로 수정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일전에 설천면 고사마을에 박씨 성을 가지신 어르신 한 분이 대국산성에서 고사마을 내려오난 산등성이 명칭이 편구등이라 일러 주셨습니다.
따라서 축문상의 편구 석산과 대국산의 편구등과의 관련성도 조명해 보아야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남향보존회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저희 집안은 병자호란 당시 명나라와 전쟁 중에 있던 청나라가 병자호란에서 이긴후 조선에 귀화한 명나라 장군의 후손들을 모두 중국 땅으로 압송하라는 요구에 따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심산계곡으로 고해절도로 뿔뿔이 흩어져 살았고 심지어는 성씨까지 숨기고 살았던 적도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과의 전쟁에서 수많은 공을 세웠다는 이유로 부산 태종대에 있었던 천만리 장군의 공적비를 파손하여 땅에 묻는 등 많은 수난을 당하였습니다.
현재 공적비는 해방 후 후손들이 다시 되 찾아 부산 동구 소재 자성대 공원에 재건립 하였습니다.
이렇듯 임진왜란 당시 어려움에 처한 조선을 구원하기 위해 만리 길 멀다 않고 달려와서 수 많은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국내외 정세 혼란으로 후손들은 순탄치 않은 삶을 살 수밖에 없었으며 할아버님 역시 제대로 된 역사적 평가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향보존회라는 곳에서 할아버님의 제사를 모셨다는 것에 대해서 후손으로서 마땅히 찾아 뵙고 감사의 말씀을 드리는게 도리일 듯 싶습니다.
아무쪼록 대국산성 축성에 관한 역사적 사실이 제대로 밝혀져 천 장군의 전설이 전설이 아닌
사실로 기록된다면 등자룡 장군에 이어 천만리 장군 역시 남해와의 깊은 인연으로 인해 향후 남해와 중국과의 교류에 또 하나의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며 한국은 물론 중국의 영양 천씨 종친회에서도 남해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일 것이라는 예상을 조심스럽게 해봅니다.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2021년 9월 24일 천지훈 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