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내용
다천사가 용문사에 합쳐진 후 절터에 남은 탑.
구전의 의하면 원효대사가 신라 신문왕 때 이곳에 다천사를 창건하고 탑을 건립하였으나 조선시대에 이르러 다천사보다 명지인 용문사에 합사함으로써 탑만이 남게 되었다고 전한다.
이곳에 탑이 있다고 하여 탑골이라고 불려지다 다천으로 지명이 바뀌었다. 탑이 섰던 들과 북쪽 들을 화정들 혹은 화정 등으로 불리어 오는 것으로 보아 다른 명칭인 화정사의 사지로도 추정하고 있다. 탑골 사람들은 경내에 남아 있는 이 탑을 절 대신으로 여겨 계속 불공을 드렸으며 탑 주변에 그 흔적이 있다.
원래 이 탑은 삼층석탑이었으나 1층은 매몰되고 2층과 3층의 탑신부와 무개가 남아 있다. 탑신의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이 보이고, 지붕돌 밑면에는 3단의 받침을 두었다.
탑 상륜부에 3개의 보주(寶珠:작은 공모양 장식)가 남아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완전한 모습은 아니지만 지붕돌이 두툼해지고 밑면의 받침이 3단인 점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 탑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