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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충렬사1

상세정보

  • 명칭 : 남해 충렬사
  • 위치 : 노량로183번길 27
  • 문의 : 문화체육과 문화재팀
  • 전화 : 055-860-8631
  • 지정 : -
  • 수량 :
  • 시대 : 조선시대

상세내용

순국 후 이순신 장군의 시신이 모셔졌던 곳에 세워진 사당으로 묘비와 가묘가 있다.
남해 충렬사는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순국한 충무공 이순신의 충의와 넋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사당이다. 통영의 충렬사와 함께‘충렬’이란 현판을 처음부터 같이 사용해 왔으며 인조 때 지어졌다. 충무공이 전사한 후 그의 시신이 한때 이곳에 모셔졌는데 1633년(인조 11) 김여빈, 고승후 등 유림들이 옛터에 초옥 1칸을 짓고 제사를 지냈던 것이 최초의 사당이다. 충무공이 순국한 지 60년이 되던 1658년(효종 9)에 어사 민정중(閔鼎重)이 통제사 정익(鄭木益)에게 명하여 좁고 초라한 옛집을 헐고 새집을 지었다. 그 후 1663년(현종 4)에 통영 충렬사와 함께 임금의 친필로 내려준 현판을 받게 되었다. 이런 사실들을 기록한‘유명조선국삼도수군통제사증시충무이공묘비(有明朝鮮國三道水軍統制使贈諡忠武李公廟碑)’가 사당 곁에 있다. 비문은 1661년(현종 2)에 송시열이 짓고, 송준길이 썼다. 1663년에 박경지, 김시성 등이 세운 것이다. 1643년 이순신 장군에게 충무라는 시호가 내려졌기 때문에 1633년 남해현령 이정건(李廷楗)이 세운 충민공비를 철거하고 1793년 5대손 이명상이 이충무공비를 다시 세웠다. 1726년 노량서원을 개원했으며, 1746년 사당 곁에 호충암(護忠庵)이라는 암자를 짓고 화방사의 승려 10명과 승장 1명이 번갈아 와서 사당을 지켰다고 한다.또한 공이 죽은 후 자운이란 승려가 공을 사모하여 쌀 수백 섬을 싣고 와서 공을 위해서 제사를 지낸 것으로도 유명한데, 자운은 원래 충무공의 밑에 있던 승병이었다. 충렬사는 노량 앞바다를 지키고 있는 수호신의 사당이라 할 수 있다. 1760년 5대손 통제사 이태상(李泰祥)이 청해루를 짓고, 1769년 6대손 이한응(李漢膺)이 비각을 중수하고 사우를 단청하는 등 후손들이 충렬사의 중건에 많은 힘을 쏟았다. 하지만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충렬사는 훼철되었다. 이때 위패는 본당 뒷편에 묻고 제기는 향교로 이관했으며, 토지는 매각했다. 충렬사에는 비각만 남게 되었다. 그 후 1899년 11대손 이민승(李敏承)이 비각을 중수하고 1921년 남해사람인 박진평과 정민주가 비각을 중건하고 이듬해 보존회가 조직되어 본래의 모습을 찾았다. 경내에는 비각·내삼문·외삼문·관리사 청해루 등이 있고 사당 뒤의 정원에는 충무공의 시신을 임시 묻었던 자리에 묘가 남아 있다. 1949년 정인보가 짓고 김충현이 쓴 충렬사 한글비의 비명은“로량바다는 리충무공 전사하신 데라 여긔에 충렬사를 세우니라”라고 되어 있다.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로 내삼문에 충렬사(忠烈祠)와 비각에 보천욕일(補天浴日)이라는 액자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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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부서 :
문화체육과 문화재팀( 055-860-8631)
최종수정일 :
2020.10.23 15: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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