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경 화방사

상세 내용
분류 문화관광 > 남해12경
내용 신라 애장왕 때 창건된 절로 열두 명의 고승을 배출한 남해 최대의 사찰이다. 임진왜란 때에는 승병활동의 근거지로서 조선 숙종 때 수국사로 지정, 보호받기도 했다. 현재의 절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재건한 것으로, 경내 문화유적으로는 대웅전(경남 유형 문화재 제 85호)과 석불좌상(경남 유형문화재 제138호), 명부전(경남 문화재 자료 제151호), 천왕각(경남 문화재자료 제150호)과 조선 인조 때의 학자 유희경의 시집인 촌은집을 간행키 위해 만든 판목으로 시·수창·전기·모포 등을 수록 판각한 "촌은집책판" (경남 유형문화재 제 172호) 등이 있다. 용문사의 유래는 원효대사가 금산(錦山)을 찾아와 보광사를 짓고 산명(山名)도 보광산이라 하였다. 이때에 현 용문사에 첨성각(瞻星閣)이 세워졌다고 전하고 있으며 금산에 있었던 보광사를 이 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 후 시절인연(時節因緣)따라 백월당대사가 남쪽에 있는 용소(龍沼)위에 터를 정하고 용문사라 하였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의 말사이다. 802년(신라 애자왕 3) 창건되었다. 1592년(조선 선조 25) 임진왜란 때 이 절 승려들이 승병으로 참여하여 왜군과 싸웠는데 이 때 절이 불에 타 없어졌으며 1661년(현종 2) 학진(學進)이 인근 보광사(普光寺) 건물을 옮겨와 중창하였다. 보광사는 원효가 세운 사찰이었으나 이곳으로 옮길 때에는 폐사 직전의 상태였다고 한다. 용연(龍淵) 위쪽에 터를 잡았다고 해서 용문사라고 이름을 붙였다. 임진왜란 이후 호국도량으로 널리 알려져 숙종(재위:1674∼1720) 때 나라를 지키는 절이라며 수국사(守國寺)로 지정하였다. 또 이 때 왕실의 축원당(祝願堂)으로 삼았다. 1703년(숙종 29)과 1735년(영조 11), 1819년(순조 19), 1857년(철종 8), 1 970년에 각각 중수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천왕각, 명부전, 칠성각, 봉서루, 산신각, 요사 등이 있으며, 산내 암자로는 1751년(영조 27)에 세운 백련암(白蓮庵)과 염불암(念佛庵)이 남아 있다. 용문사 대웅전은 정면 3간, 측면 3간의 팔작지붕 건물로 처마 밑에 용두(龍頭)를 조각해 넣었다. 1974년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되었다. 용문사 천왕각과 용문사 명부전은 1985년에 각각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150호, 제151호로 지정되었다. 한편 백련암은 용성과 성철 등 고승들이 수도하던 곳으로 경봉이 쓴 편액이 걸려 있다. 유물로는 용문사 석불과 촌은집책판이 각각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38호, 제172호로 지정되었다. 이 중 용문사석불은 높이 약 81cm로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절을 중창하기 위해 땅을 파다가 발굴되었다고 한다. 촌은집책판은 조선 인조 때 학자인 유희경(劉希慶)의 시집《촌은집(村隱集)》을 간행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그밖에 임진왜란 때 승병들이 사용하던 대포 삼혈포(三穴包)와 숙종으로부터 하사받은 연옥등(蓮玉燈) 2개, 촛대, 번(幡), 수국사 금패(禁牌) 등이 있었으나 연옥등과 촛대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훔쳐갔다고 한다. 절 입구 일주문 오른쪽 언덕에 9기의 부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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