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량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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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문화관광 > 문화재
내용 위치 : 남해군 창선면 진동리 적량 규모 : 평지진성 부속물 : 첨사김정필선정불망비 시 대 : 조선시대 관리자 : 적량이장 남해군 창선면 진동리 적량에 위치한 적량성(일명 진동성)의 축성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세종실록에 의하면 세종 2년(1420)에 “도내의 거제, 남해, 창선의 3개 섬 가운데 전지(田地)가 많은 곳에 목책(木柵)을 만들거나 토성을 쌓고 백성이 무기를 가지고 들어가서 농사를 짓게 하고 밤에는 성에 들어가서 굳게 지키며 부근 항구에 있는 병선으로 하여금 그들을 수호케 하였다”라는 기록을 보아 세종 2년(1420)에 축성 되었다고 추정하며 군비로는 전선1, 병선1, 사후선2, 장졸227명, 군량미427석으로 통영통제사에 속해 있으면서 첨사가 다스렸다. 특히 적량성을 지키기 위하여 굴강을 파고 병선 등 선박을 감추어 두기도 하였는데 굴강은 지금 농토로 개간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에는 왜적을 방비하는데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으며 이충무공전서에 의하면 적량만호 권 전(權 詮)은 통제사 이순신의 아장(亞將)으로 선조31년(1598)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통제사 이순신과 동시에 전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원균이 칠천량해전에서 패하자 배설이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가다가 이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적량성을 불태우고 떠났다는 설도 있다. 현재 적량성은 대부분이 택지화되고 붕괴, 멸실되었으며 일부 석축이 민가의 담장으로 이용되어 잔존하고 있다. 임진왜란 후 적량성에는 고종 26년(1889)에 세운 비석이 하나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절충장군행첨사김후정필선정불망비 (折衝將軍行僉使金候廷泌善政不忘碑), “래하기묘수공신폐(萊何基墓隨公神弊). 소아민기익맥휼기(蘇我民基益脈恤飢). 채목자비천추유덕(砦木自備千秋遺德). 름김혜산수공지(凜金惠山水公之). 광서(光緖.고종26년.1889)15년 기축(己丑)6월 일 군민립(軍民立). 감역(監役) 김문홍(金文洪) 수민(首民) 박두흡(朴斗洽).이라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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