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 대장군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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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문화관광 > 문화재
내용 삼별초는 고려국 자존심을 남해에 심었다. 삼별초(三別抄)란 무엇인가? 고려시대 최우(崔瑀) 집권 당시 나라 안에 도적들이 많아 이를 잡기위해 조직된 야별초(夜別抄)가 차츰 규모가 커짐에 따라 좌·우별초 (左右別抄)로 나누어졌고 또 몽고군에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온 자들로 신의군 (神義軍)을 만들었는데 좌·우별초와 신의군이 통합되어 삼별초라 했다. 그래서 삼별초는 국가에서 조직된 공적인 군대가 아니라 최우가 만든 사사로운 군대이다. 그러나 삼별초의 힘은 국가 기구인 2군6위(二軍六衛)가 쇠퇴함에 따라 안보와 사회질서를 확립하는데 더욱 막강한 힘을 가지게 되어 경찰, 경비, 친위, 특공과 국가수호를 위한 군사적인 활약을 하면서 나라 안팎의 모든 일에 간섭하는 권력기구로 변신하였다. 때는 고종18년(1231). 몽고군이 남하하여 고려군을 격퇴하고 개경을 포위한 후 고려에 항복을 강요하였다. 이에 고려군은 금품과 예물을 바치면서 물러갈 것을 청했으나 몽고군은 서경(西京)이하 북계(北界) 14군데 성(城)에 달로화적(達魯花赤:몽고지방장관)을 두고 요동으로 퇴거했다. 그렇지만, 몽고가 고려에 항복을 계속 강요함에 따라 고종19년(1234)에 형식적으로 항복하였다. 그런데 몽고는 고려에 동남동녀의 공납과 조공 등 강압적인 요구가 날로 심해지니 이를 견디지 못한 고려는 결국 원종10년(1269)에 정부가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를 단행하였다. 이에 삼별초는 반기를 들고 항몽(抗蒙)을 재개하는데 장군 배중손(裵仲孫)은 새로운 고려정부를 세우기 위해 고려 왕족인 승화후(承化侯) 온(溫)을 왕으로 삼고 대장군 유존혁 (劉存奕)과 이신손(李信孫)을 승선(承宣)으로 삼아 왕의 좌우에 있게 하였다. 이런 행위는 고려정부로 인정치 않지만 고려인의 자존심과 구국정신 없이는 해 낼 수 없는 일이었다. 원종11년(1270)에 삼별초군은 개경으로 환도하지 않고 강화도에 남아 몽고에 저항하다 전선 천여척으로 재화와 백성, 노비까지 모두 싣고 남하하였다. 진도에 도착하여 용장성을 쌓고 궁전을 세워 남해, 창선, 거제, 제주 등 30여 섬을 장악하니 해상왕국이 건설되었다. 이때, 왕을 보좌하던 승선 유존혁이 남해에 주둔하면서 조공선을 탈취하고 진도 배중손과 같이 남해안 일대를 장악하였다. 어떻게 보면 남해는 동·남해안의 해안 길목이며, 여러 섬과 경상도 남변의 중심이 되는 곳으로 진도보다 중요한 요충지라 보는데 삼별초의 남해 본거지는 어느 곳일까? 남해에 삼별초가 주둔했다고 전해지는 곳이 있다. 바로 서면 서호리 대장군터이다. 대장군터가 있는 아랫마을에 서상리와 서호리가 있고 그 앞에 홀포가 있으며 대장군터에서 흐르는 계곡수는 서상항으로 흐른다. 배후로는 망운산 줄기가 자연성곽을 이루고 인근에 둔전과 염전도 있었다. 이곳 유적에 4단석축이 잔존하고 있는데 진도 용장성 축성과 비슷하며 채집되는 유물도 당시 와편이나 자기편들이다. 대장군터에 관한 전설도 심상치 않다. 옛날 장군이 살면서 부채를 부쳐 조공선을 탈취했다는 내용인데 왜 하필 조공선이라 했을까? 이러한 내용들을 종합해 볼 때 삼별초의 주둔지였음을 짐작케 하나 정확한 물증자료가 없어 아쉬움을 남긴다. 또 다른 지역과 연계해 보면, 남해에서 1236년부터 1251년까지 판각된 고려국분사남해대장 도감터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1251년과 1270년은 불과 20년이 채 되지 않는다. 그 곳에는 많은 시설과 재원이 풍족했을 것이라 본다면 본거지는 대장도감터이고 대장군지는 소속된 기지역할이었을 것으로 추정해 보면서 앞으로 더욱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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