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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휴가 후기

작성일
2004-09-25 21:49:25
작성자
박○○
조회수 :
3041
남해 휴가 후기 2004년 8월 박 대 근 7월 중순쯤부터 내려 쬐기 시작한 폭염이 하루도 거르지 않은 채 7월 말까지 기승을 부려 하루라도 빨리 휴가가 다가오길 놀러간 애인 기다리듯 근 2주 째............... 드디어 휴가다. 올 초부터 남해로 의견접근은 보았으나 준수아빠의 해외 출장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어디로 가느냐로 의견이 분분하였으나 예정 되로 남해로 낙찰되었다. 10여 년도 훨씬 전에 아무도 차가 없었을 때 한솔이 아빠의 노력으로 12인 승 봉고 차 한대를 빌려 우리 6가족이 설레 이는 마음으로 다녀왔던 곳 그곳에서 이제 휴가를 보내게 된 것이다. 소풍가는 아이처럼 밤잠도 설치고 행여나 준비물을 빼먹을까 마누라에게 다시 확인하라고 닦달하며 새벽녘 누가 깨우지 않아도 일찍 일어나 괜히 소란을 피운다. 큰아들이 매일 학교에 가야함으로 컵 라면과 음식물은 충분히 준비해놓고 혼자 두고 가야하는 미안함에 이것저것 평소보다 더 살펴본 후 한솔이네가 벌써 고속도로에 접어들었다는 전화를 받고서야 집을 나섰다. 울산에서 남해까지는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남해고속도로를 달려야하는 4시간이나 걸리는 장거리이다. 매년 그렇듯 휴가철 고속도로는 우리나라의 국민소득과 경제성장에 따른 1가구 1.2차량으로 인해 그야말로 고생도로다. 내가 가는 고속도로 역시 언양에서 정규속도도 내기 전부터 밀리기 시작해서 마산을 지나서야 겨우 소통이 되기 시작한다. 같이 가는 대현이네와 한솔이 가족들과 남강 휴게소에서 간단한 아침을 먹고서부터 제 속도로 달린지 한 시간여 멀리서 붉은색 철 구조물의 남해대교가 점점이 펼쳐져 있는 섬들의 관문임을 과시하듯 우뚝 서 있는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남해대교......... 1973년도 우리나라가 처음 경제성장을 시작할 무렵 우리의 기술로는 어림도 없다 할 때 현수교의 공법으로 물살이 센 바다를 단숨에 건너 띈 다리로서 우리나라의 다리를 현대화시킨 시초가 된 것이다. 또한 1598년 8월 17일 임진란의 원흉 풍신수길이 죽으매 왜적의 철군이 시작되었다. 이순신 장군은 그 해 11월 18일경 저녁 마지막 달아나는 왜함 500여 척을 추격하여 남해 노량에서 큰 격전을 벌이다 날이 샐 무렵에 탄환을 맞아 전순하셨다. 이 마지막 격전으로 적은 크게 패하여 500여 척의 전함 중 겨우 50척만이 남해로 달아났다고 한다. 이로써 왜적은 완전히 의기소침하여 전의를 잃고 침략의 야욕을 굽히니 피비린내 나는 7년 간의 임진란이 종식되었던 것이다. 그 노량해전이 있었던 곳이 바로 남해대교가 있는 이곳이니 충무공의 사당인 충렬사가 다리 아래로 고느적히 2004년의 여름을 맞이하고 있었다. 태풍이 올라온다는 소식에도 바다는 조용하다. 한낮의 뜨거운 열기와 남해의 자연 속에서 우리들의 해후와 휴가의 시작은 바다의 썰물 시간과 극적인 조화를 이루면서 시작되었다. 남해 우물리 준수네 외갓집에 도착 후 좁지 않은 주방에서 20여명이 복잡스럽다. 점심을 준비해준 성의가 고마워 부지런히 1번으로 먹고는 자리를 비켜주었다. 벌써 썰물은 저만치 물러나 있는데 빨리 바다로 가서 조개와 쏙(새우의 한 종류인 것 같음)을 잡아야 하는데 도시에서 온 바쁘지 않은 우리네를 바라보는 준수 엄마는 쏙을 잡기 전에 속부터 탄다. 마을 회관에 옷가지며 준비해온 음식물을 비치하는데 1시간이나 걸리고 나서야 드디어 갯벌로 향했다. 가지고 간 삽으로 갯벌의 윗 부분을 살짝 걷어내고 고인 물을 일정부분 빼내면 쏙이 들어있는 구멍들이 빼곡히 나타난다. 그 구멍들 중에 쏙이 있을 만한 구멍에다 그림을 그리는 작은 붓을 넣고 잠시 기다리면 그 구멍 속의 쏙이 적 인줄 알고 붓을 밀어내며 밖으로 나오는 순간 손으로 잡으면 되는데 그것이 생각만큼 쉽질 않다. 우리들은 한 마리도 잡질 못하는데 준수 엄마는 역시 프로다. 잡은 쏙의 허리에 실을 동여매어 또다른 쏙의 구멍에다 집어넣어 벌써 여러 마리를 잡았다. 잡지 못하니 실증이 나고 실증이 나니 또다른 뭔가를 찾는데 저기 썰물의 끝에서 무언가를 캐고있다. 조개다! 모래와 뻘이 섞인 땅을 5cm 가량 걷어내니 참조개가 제법 굵은 놈들이 솔솔찮게 잡힌다. 많다!!! 억수로 많다. 열심히 캐고 있는데 밖으로 나오란다. 이런!! 우리들은 조개 양식장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아쉬움과 미안함이 교차하며 밖으로 나왔다. 여름 오후의 쨍한 햇빛과 물 빠진 갯벌의 그늘하나 없는 곳에서 조개를 줍고 속을 잡는 즐거움은 잠시뿐 뜨거운 땡볕과 삐죽삐죽 돋아난 굴 껍질에 베인 상처가 크게 보일때쯤 대부분 그늘을 찾아 옹기종기 모여 갈증을 달래줄 물을 찾고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일꾼 준수 아빠 엄마는 열심히 잡고 있다. 그래!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듯이 일도 해본 사람이 역시 잘한다. 덕분에 우린 마을회관 주방에서 맛있고 싱싱한 쏙과 게를 튀겨서 먹을 수 있었다. 삼겹살도 굽고 하면서 몇 순 배 돈 술잔에 이미 난 만취해 버렸다. 저 녘 달이 휘영청 떠오를 때 아줌마들이 산사 음악회에 갔다오겠다며 산 속 절로 향했다. 아지매들이 송 창식과 한 영애의 노래에 취했을 때 정에 취하고 술에 취한 나는 어젯밤 못 다 잔 잠까지 잠들어버렸다. 날씨가 맑다 온다던 태풍은 동해를 살짝 스쳤을 뿐 남해나 서해 쪽은 영향이 미치지 않았다. 어젯밤 일찍 잠든 덕분에 머리가 맑고 개운하다. 아침 동이 트기전 와이프를 살짝 깨워 마을 옆 언덕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오르는 길옆으로는 남해의 특산물 유자나무에 탱자 같은 열매들이 주렁주렁 매달려있고 섬의 들에서만 볼 수 있는 잎이 긴 이름 모를 풀(갈대 같은)들이 심어놓은 것처럼 가지런하다. 고개 언덕 위에 오르니 강 같은 바다 너머로 공업화가 된 여수가 한눈에 들어오고 섬사람들의 부지런함이 언덕 위까지 밭과 논을 만들어 놓았다. 고느적한 언덕을 바람이 휘둘러 놓으니 고운 풀잎과 억새들이 저마다의 모양새로 흔들리는 품이 아름답다. 역시 자연은 저마다의 행동으로 움직이고 있지만 질서가 있고 아름다움이 있다. 사람들이 배워야 하는 것은 역시 자연의 질서와 무욕이리니...... 아침의 고요함에는 자연의 빛깔과 가르침이 있었다. 나만의 즐거움으로 짧은 산책을 끝내고 내려오니 모두들 일어나 오늘의 행선지를 위해 분주하다. 이제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필요한곳에서 제 몫의 움직임으로 일사불란하다. 지금 고3인 현준이가 돌 일 때 나들이회가 구성이 되고 매년 여름이면 텐트와 배낭을 메고 다니며 같이 보낸 시간이 벌써 16∼17년 동안 같이 해온 결과 일 것이다. 예정 되로면 배를 빌려 낚시도 하고 작은 섬에 내려 즐거운 오락도 해야 하지만 빌리기로 했던 배가 고장이 나서 스포츠 파크 관광과 어제와는 다른 바닷가에서 물놀이겸 조개를 줍기로 했다. 우물리에서 바다를 끼고 20∼30분 가량 달리니 스포츠 파크가 나온다. 광양제철소 건립시 준설한 실트질 준설토로 매립된 서상 매립지에 군민과 관광객의 여가와 휴식을 즐기는 운동 휴양지로서 국내외 프로팀의 전지훈련장으로 활용할 복합 스포츠 파크로 깨끗하게 단정된 도로와 각 구장들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우리들에겐 맨발도로의 산책과 속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바다가 일품이였다. 달구어진 돌과 조각난 콘크리트 위를 걸을 때는 발바닥의 뜨거운 맛사지가 건강한 즐거움으로 남해사람들의 휴식처로 그만이다.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와 준수엄마 고모부께서 사신다는 염해리 바닷가에서 조개를 줍기로 했다. 보름을 맞아 썰물이 꽤 나갔으므로 조개 줍기에는 좋은 날이다. 게와 조개 그리고 우렁이처럼 생긴 고동을 작은 돌을 걷어내면 심심찮게 잡힌다. 하지만 잡는 사람이 많이 잡을 뿐 우리네 돌팔이들은 흉내만 낼뿐이고 목포의 은주 아버지는 본격적인 데이트가 시작된 것 같다. 스포츠 파크에서도 지혜엄마와 둘이서 다니더니만 이 바위 저 바위 옮겨 다니며 데이트에 바쁘다. 사랑!!! 좋은 것이지...... 그저 같이 있기만 해도 좋은 것이니까. 삶의 중간에서 새로운 사랑이란 쉽지가 않거늘 아무쪼록 좋은 결과와 아름다운 길을 만들어 가길 바란다네. 홍합과 조개, 고동을 참 많이도 잡았다. 당분간 염해리 마을 옆 해변은 허허로울 것 같다.(너무 많이 잡아버려서) 조개와 고동을 씻는 것이 만만하지를 않다. 고무 바구니에 소금을 넣고 여러번 문질러 올초에 다친 허리에 무리가 올 때쯤 겨우 되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배를 알아보러 간 준수엄마가 고모부에게서 얻은 문어를 잔뜩 가지고 왔다. 어른 주먹만한 머리를 가진 놈들이 20여 마리는 될 것 같다. 마을 회관 앞마당에 어제처럼 다시 자리가 펴지고 삶은 돌 문어에 조개탕과 홍합국물이 푸짐하고 더불어 참이슬이 바쁘게 오고 간다. 이제는 알고 있다. 주고받는 말이 많지 않아도 가슴의 울림만으로도 오고가는 뜻이 무엇인지를................ 바닷물에 담구었던 바지춤이 소금끼로 찜찜하여 모두들 개울가로 멱을 감기로 했다. 얕은 개울이라 무릎까지 겨우 차지만 이게 얼마 만인가? 어릴적 친구들과 개울가에서 피라미 미꾸라지를 잡으며 발가벗고 멱을 감아보고는 처음이라 괜스리 지나가는 차량의 불빛이 민망하다. 그 후 난 마당에 깔린 자리에 잠들어 있는 나를 보았다. 홋 이불에 마누라가 옆에 누워있고 옆자리엔 한솔이 엄마 아빠가 잠들어 있고 오른쪽엔 은주 아빠와 광주댁이 자리를 펴고 잠들어있고 보름의 밝은 달이 그려놓은 것 같은 구름 길을 따라 산등성이를 휘휘 젖으며 가고 있다. 시골의 아침은 부산하다. 사물이 구별되기 시작하면 아침해가 뜨기 전까지 열심히 일해야한다. 한낮에는 더위 때문에 농사일은 고사하고 밭에 앉아 있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준수 외할아버지의 밭에서 콩을 베기 시작했지만 나와 정훈이 덕기는 아침 밥값도 힘들다. 동철이 혼자서 3인분 몫을 하고 우리3명이 1인분을 했을 뿐이다. 그래도 기분은 좋다. 우물리 답게 샘물이 많은 동네이므로 내려오는 길에 등목도하고 생색도 낸다. 오늘의 일정은 상주해수욕장에서 해수욕을 하고 금산의 보리암을 둘러보는 것이다. 상주해수욕장 입구에서부터 주차요금과 바가지같은 상행위가 기분을 언잖게 하지만 우리의 친구 동철이가 솔밭에 자리를 폄으로서 자릿세를 과감히 아끼고 우린 칙칙폭폭 기차놀이와 즐거운 해수욕을 오후가 되도록 즐겼다. 간만의 차가 심하고 뻘이 많아 해수욕장의 탁한 바닷물이 별로 달갑지 않지만 아이들과 모두 어울릴 수 있는 최고의 놀이가 바닷물에서 함께 뒹구는 것이다. 아이들은 먹을 때를 빼고는 물에서만 논다, 이제 제법 큰 녀석들은 어른들의 깊이까지 들락거리며 스스로 다 자란 것처럼 물 속에서 자유스럽게 즐긴다. 솔밭에서는 취사를 할 수 없다는 해수욕장 관리소의 방송에도 비싼 음식을 사먹을 수 없기에 라면을 냄비 가득 끓여먹고는 대충 정리를 했다. 금산의 보리암으로 가는 길은 이미 늙어버린 내 차의 엔진 성능을 시험하고 있었다. 금산 국립공원 표를 사고부터 시작되는 비포장의 오르막길은 2단을 올리지 못하고 엔진의 냉각수가 끓어오를 때쯤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의상대사와 함께 신라불교를 대표하는 원효대사가 강산을 유행하다가 이산의 승경에 끌려 들어 왔는데 온 산이 마치 빛을 발하는 듯 빛났다고 한다. 초당을 짓고 수행을 하던 원효는 이곳에 보광사를 세웠다는 것이다. 이후 보광사에서 백일기도를 올렸던 조선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른 후 감사의 뜻에서 사찰을 둘러싼 산의 이름을 금산이라 부르게 했으며 1660년 현종이 이 절을 왕실의 원당으로 삼으면서 보리암이란 새 이름을 얻게 되었다. 보리암의 '보리'는 '깨달아 도를 이루었다'는 뜻이다. 금산의 정상에 자리잡고 있는 보리암은 금산의 온갖 기이한 암석과 푸르른 남해의 경치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절이였다. 되돌아 오는길에 아이들은 읍내에 있는 게임방과 노래방에서 자기들끼리 만의 시간을 만들어 주었다. 바다에서의 물놀이와 짦은 산행이지만 꽤나 피곤할텐데 게임방이라는 소리에 모두들 신바람이 났다. 회장과 준수엄마가 시장을 보는 사이 백일홍 한 그루가 예쁘게 핀 언덕에서 마을 전경을 한 컷 찍었다. 늦은 오후이고 구름에 가린 태양 때문에 선명한 사진은 아니지만 조용한 시골의 정경이 평화스럽다. 어쩌다 떨어지는 빗방울이 남해의 마지막 밤을 아쉬워하듯 우물리 마당으로 한 두 방울씩 떨어지고 펴진 자리 위에 마을 이장님과 어르신들께 술도 한잔 대접하면서 마을 주민들이 밤이면 막걸리도 드시고 장기도 두고 화투도 치며 즐거웠을 마을회관을 선뜩 내준 것이 고마워 많지는 않지만 일정액의 사례비를 드렸다. 우리들로선 넓은 방과 주방이 좋은 숙소였고 휴가의 근거지로 참 싸고 즐겁게 즐기다 가는 것이다. 마을 회관 앞에서 전 가족이 모여 기념 촬영을 했다. 각자의 짐 정리와 차량의 점검 등으로 사진 한번 찍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다 내키는 김에 가족들 사진까지도 일일이 다 찍은 다음 마을 회관 안 밖을 깨끗이 청소한 후 경남 사천을 잇는 남해의 동쪽 끝으로 향했다. 가는 길목에는 죽방렴이 옛 모습 그대로 바다 위에 펼쳐져 있다. 죽방렴은 약 10m 크기의 참나무를 개펄에 조밀하게 박아서 그물처럼 만든 것으로, 조류가 흘러드는 방향으로 V자형을 이루어 일단 들어온 물고기는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만든 원시적인 고기잡이 시설로써 간만의 차가 큰 이곳 남해 주변에서 옛부터 고기를 잡는 방식이다. 남해의 동쪽 끝에는 창선대교가 마지막 관문으로 남해대교와 더불어 남해도와 육지를 잇는 다리로 일반국도 3호선이 연결된다. 길이 483m, 너비 14.5m이다. 다리 높이는 7m이고 경간은 5개이다. 경간 사이의 최대 거리는 90m에 이른다. 1995년 12월에 개통되었다. 본래 1980년 6월 5일 준공된 창선교(昌善橋)가 있었으나 1992년 7월 30일 붕괴되어 그 자리에 다시 세웠다고 한다. 다리는 웅장하고 섬을 이어 붙인 도로의 볼록한 곡선과 와이어의 직선미가 힘찬 물살을 닮았다. 지는 저녘 노을에 바다로 떨어지는 해를 바라보면 모두가 시인이 될 것 같은 멋진 풍경이 다리 너머로 섬과 바다가 어우러져있다. 밤이면 다리에 비추는 불빛 또한 남쪽 바다를 못 잊게 한다는데 시간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삼천포 어시장에 들렀다. 어물전의 생선들이 싸고 싱싱하다. 동철이는 커다란 칼치를 두 봉지 가득 담고도 더 살 것이 있다며 여기저기를 쏘다니고 모두들 커다란 봉지 하나씩을 들고 있다. 나 또한 구워 먹을 큰 돔을 작은 아이스박스에 가득 담았다. 아쉽지만 이제는 각자의 길로 다시 가야한다. 움켜진 손들엔 즐거운 휴가와 헤어짐의 아쉬운 정들이 뭍어나고 다시 만날 날들을 기약한다. 봉화는 여기 남해 본가에서 좀더 시간을 보내야 할 것이고 동철이는 함양으로 덕기는 마산의 처갓집으로 정훈이는 목포로 난 울산으로 각자의 삶터나 고향으로 향했다. 다시 한번 마을회관을 빌려준 우물리 어르신들과 준수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준수 고모 고모부, 문어를 주신 봉화의 처고모부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10여년 전에 한 대의 봉고차로 남해를 다녀왔듯이 10여년후 우리들이 다시 남해의 우물리를 회상하며 찾을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때까지 어르신 모두들 건강하시고 행복한 날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친구들아! 덕분에 재미있었고 잘 도착해서 열심히 살고 있다. 인생에서 좋은 친구들은 삶의 보배라고 했다. 앞으로도 이전과 같이 서로를 배려해주며 말하지 않아도 이해해 줄 수 있는 그런 사람들로 살아가자. 모두들 화이팅!!!.....................
담당부서 :
관광진흥과 관광정책팀( 055-860-8601)
최종수정일 :
2023.10.17 17:2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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