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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 (군수님)여러분 김두관의 뜻을 잊지맙시다

작성일
2012-11-08
이름
장병길
조회 :
471
요즘 일부 몰지각한 공무원들의 무사 안일한 행위 및 책임을 기피하는 행동을 접하고 보니 문민관의 백서인 김두관 전 남해 군수님이 그리워 다음과 같이 글을 올립니다.

김두관은 남해 군수 시절 치세를 연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 36살의 나이로 군수가 된 김두관은 취임 직후 기자구락부를 폐쇄하고, 공무원과 지역 언론사와의 유착 관계를 근절하였다.

또한 취임 직후 군수 관사를 철거하고, 그곳을 민원인 쉼터와 주차장으로 사용하는 등 파격적인 행정을 열었다.

김두관은 3대째 살고 있는 낡은 집에서 출퇴근하였다.
전국 번지점프대회를 남해대교에서 개최하였다.
김두관은 군수 체면에도 불구하고 직접, 번지점프를 하여 당시 화제가 되었다.

또한 민원인 공개법정을 열어, 민원인들과 밀실에서 대화를 나누지 않고, 공개적인 법정에서 시시비비를 가렸다.
이렇게 해서 남해군의 골치병이었던 어장 분쟁 등을 해소하였다.

1970년대 독일에 파견된 간호사 등 파독 교포들이 우리나라에서 쉴 수 있도록 '독일인 마을'을 만들었다.
또한 남해에 스포츠 파크를 만들어서 여러 나라의 국가대표들의 전지훈련장이 되었다.

이렇게 김두관의 남해 치세는 당시 지방자치로서는 교범이나 마찬가지였고,
이로 인해 지자체 각종 평가에서 모두 1위를 하였고, 환경시범도시 선정, 환경대상 수상 등 각종 수상과 찬사가 이어졌다.

1. 김두관의 젊은 시절

1959년 4월 10일. 경상남도 남해군에서는 한 아이가 태어났다.
김두관. 그는 가난한 농어민의 아이로 태어났다.

모두가 가난하던 시절. 김두관 역시 가난했다. 운동화를 신어 보는 것이 어릴 적 소원이었다.
남해종합고등학교를 나와 어렵게 대학을 다녔고, 1987년에 동아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였다.
그러는 와중에 김두관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감옥에 가게 된다.
1986년 청주집회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된 것이다.
청주집회는 1987년 직선제개헌쟁취로 이어지는 중요한 집회 중 하나였다.
감옥에서 오랫동안 김두관은 고민하였다.

어떻게 해야 진정 이 사회를 사람다운 사회로 발전시킬 수 있을까? 김두관의 결론은 ‘지역’이었다.
지역의 뿌리가 튼튼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두관은 고향으로 내려왔다.

귀향 후 김두관은 남해 농민회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1988년 민중의당 후보로 13대 총선에 출마하였다.
비록 3천표, 4명 중 3위에 그쳤지만 총선 출마는 지역운동의 기반을 넓히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김두관은 고향 이어리의 이장을 맡았다.
이장 김두관. 김두관은 이 이력을 가장 자랑스런 이력으로 내세운다.
대개의 사람들은 ‘이장이 무어라고, 이력이라고 하노?’ 반문할 것이다.

그러나 젊은 이장은 마을의 일 하나하나를 직접 맡으면서 주민들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었고,
주민들이 무엇을 진정 원하는 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 지도 알 수 있었다.
김두관의 오랜 꿈이 이장의 일을 하면서 싹트기 시작했다.

곧 김두관은 남해에서 <남해신문>을 창간하였다. 소외된 주민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지역의 언론이었다.
선후배들의 지원을 받아 ‘군민주’형식으로 신문을 창간하였기 때문에 광고나 촌지 등 외부로부터의 재정에서 자립할 수 있는 신문이었다.

남해신문 사장이 된 김두관은 직접 신문 가지고 배달을 하면서 주민들의 삶을 살폈다.
남해신문은 대 성공을 거두었다.

남해 군민 절반 이상이 구독하였으며, 남해신문은 남해군민들의 가장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신문이 되었다.
기성의 지역 언론들이 관공서 광고나 지역의 토호들이나 기업들에게 기대는 사이, 남해신문은 그 누구의 간섭과 의존을 받지 않고 스스로 남해군민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김두관은 1995년. 당시 37세의 나이로 남해군수로 당선되었다.
돈도 없고, 조직도 없었지만 김두관의 진정성 있는 활약에 남해군민들이 손을 들어준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지방자치의 교범이라고 할 수 있는 김두관의 남해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2. 김두관의 남해 혁명

김두관이 남해군수로 취임한 직후, 과거 권위주의의 상징인 군수 관사를 헐어 버렸다.
대신 그 자리에 민원인 전용 주차장과 느티나무 쉼터를 만들었다.
김두관은 번듯한 관사가 아니라 대대로 살고 있는 허름한 자택에서 출퇴근 하였다.
다음으로 군수실의 한 쪽 벽은 투명한 유리로 바꾸었다.
모든 행정을 주민들과 소통하면서 투명하게 처리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또한 주민의 이해가 첨예하게 엇갈리는 민원을 공개된 장소에서 토론하고, 투명하게 결정하는 민원인 공개 법정 제도’를 실시하였다.
공개법정은 남해군에 일대 혁신을 일고 왔다.

당시 어민들의 생존이 걸린 어장 이설권 문제를 현명하게 처리하였으며, 마을버스 운행 허가권, 마을공동묘지 공원화 시범사업 등 각종 민생현안이 공개법정에서 주민들의 참여와 토론 속에 합리적으로 결정되었다.

이 밖에도 남해군이 발주하는 각종 공사에 주민의 의견을 반영하는 ‘주민 공사 감독관제 220명 이상의 주민만 요구하면 성립되는 ‘감사 청원제도’ 등을 속속 도입했다.

이제 남해군의 모든 행정 결정은 주민들의 의사와 요구, 토론과 공개된 곳에서의 투명한 처리 없이는 이뤄질 수 없도록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풀뿌리 민주주의인 지방자치의 진정한 모습이다.

이 밖에도 지역언론과 관공서의 부적절한 관계를 청산하기 위하여 군청 기자실을 폐쇄하였다. 과거 군청 기자실에서는 촌지가 오가고, 그의 대가로 일종의 보도지침이 하달되는 등 지역주민들의 눈과 귀를 멀게 하는 공간이었다.

김두관의 남해 혁명은 끝이 없었다.
파독 광부들과 간호사들이 조국의 땅에서 쉴 수 있도록 한 ‘독일인 마을’, ‘남해 스포츠 파크’ 번지 점프 이벤트 등을 만들어 남해군이 관광의 도시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하였다.

김두관의 남해 혁명으로 남해군은 수많은 수상을 하였다.
지자체 각종 평가에서 1위는 당연하고, 환경시범도시 지정, 환경경영대상 등 남해군에 온갖 찬사들이 이어졌다.

현재 우리 남해군의 행정과 남해군의 모습은 어떠한지
남해군의 발전과 영광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하는지
한번쯤 우리모두 독백을 합시다

3. 김두관의 고난과 두드림의 탄생

2002년, 김두관은 남해군수 7년의 생활을 접고 경남도지사 선거에 출마하였다.
그러나 현실의 벽은 높았다. 김두관은 참여정부가 들어서자 초대 행정자치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군수 출신을 행자부 장관에 임명한 것은 노무현 대통령의 지방분권 의지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김두관의 중앙 정부의 입맛에 맞는 지방분권이 아니라, 지방의 시선으로 진정한 지방분권을 이루려고 노력하였다.

김두관은 지방의 시각으로 정부혁신과 지방분권을 이루려 노력하였고, 행정자치부는 정부혁신의 선도적 역할을 하였다.

그 결과 2003년 상반기 중앙부처 평가에서 최우수 부처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김두관에게 찾아온 시련은 다름 아닌 사회적 갈등이었다.

2003년 참여정부가 들어서자, 진보와 보수의 치열한 갈등이 폭발하였다.
화물연대파업, 한총련 문제, 각종 집회와 시위가 난무하였다.
김두관은 경찰을 통제함에 있어, 객관성과 중립성을 지키고, 사회적 갈등의 충돌을 최소화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호시탐탐 그를 비난하던 세력에게는 하나의 구실에 불과하였다. 2003년 9월 3일. 김두관에 대한 탄핵건의안이 통과되었다.

당시 극심한 여소야대의 상황에서 김두관을 지켜줄 수 있는 세력은 없었다.
김두관을 흔들기 위해, 나아가 참여정부를 흔들기 위해 이뤄진 탄핵이었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 희생양을 고른 것이다. 결국 김두관은 장관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김두관은 야당의 정치공세에 지방분권이 흔들리고, 공직사회가 흔들리고, 묵묵히 고생하는 경찰들의 사기가 떨어지는 것을 타는 가슴으로 봐야 했다.

낡은 정치 논리가, 새로운 시대의 흐름인 지방분권과 정부혁신을 가로막은 사건이었다. 이런 부당한 현실에 분노로 지켜보는 시민들이 있었다.

그 시민들은 김두관을 지켜주기 위해서 뭉쳤다.
이렇게 해서 두드림은 2003년에 정치인 팬클럽 2호로 탄생하였다.
다시 힘을 얻은 김두관은 열린우리당 전당대회에 출마하여 전체 3위의 성적으로 열린우리당 최고위원이 되었다.

김두관은 정치의 틀에서 다시금 지방분권과 혁신, 국가균형발전의 꿈을 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2006년 5.31 지방선거에 경남도지사 후보로 다시 출마하였다.
물론 당선보다 낙선 가능성이 높았고, 집권여당의 최고위원이라는 자리를 통해 많은 것을 할 수도 있었지만, 김두관은 그저 뒤로만 물러나서 일신의 안위를 챙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늘 현장과 현실 속에서 생동하려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길 수 없는 선거에 나선 것이다.

김두관은 이 선거에서 역시 패배하게 된다.

이후 영남 지역에서 비한나라당 광역단체장 후보로서는 가장 많은 득표율을 얻어 경남도지사에 당선되었고.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경선에 참여하였으나 낙선하였다.

김두관은 서민과 남해군민을 받들고 섬기면서 정도와 진리를 지켰다.
이렇게 김두관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민초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김두관 같은 목민관을 우리는 그리워하고 그의 치적을 잊지말고 계승하자 남해군과 우리를 위해서 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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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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