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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서공원

각서공원은 벽면형, 공간형, 터널형의 세 가지 형태로 조성되어 있다.

벽면형에는 이순신 장군의 명언, 고려 팔만대장경을 판각한 호국성지 관음포, 임진왜란, 옥포해전, 한산도해전, 부산포해전, 명량해전, 노량해전에 대한 설명과 상황도가 그려져 있다. 공간형에는 이순신 장군의 칼의 빛, 승전, 불멸의 이순신, 조.명연합작전 등이 영상 및 체험공간으로 구성되었으며, 터널형에는 조.명.일 삼국의 수군을 대표하는 모형을 연출한 공간이다.


벽면형 각서

충무공 이순신

충무공 이순신

이순신(李舜臣) 장군은 1545년(인종 1) 한성부(서울) 건천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字)는 여해(汝諧)이다. 어려서부터 활달하고 강직함을 보여 무인의 자질이 있었다. 처음에 유학을 배웠으나 22세에 비로소 무예에 뜻을 두고 훈련을 시작했다. 1572년(선조 5) 무과에 응시했으나 낙마하여 급제에 실패한 후, 1576년(선조 9) 32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하여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으로 처음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훈련원 봉사, 발포 수군만호, 건원보 권관 등을 역임하면서 특히 함경도 변방의 오랑캐 토벌에 공을 세웠다. 사복시 주부를 거쳐 조산보 만호직을 수행하던 중 오랑캐 침입으로 피해를 입어 한때 백의종군을 하였으나, 이후 정읍 현감 등을 거쳐 1591년(선조 24)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발탁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출전하여 크고 작은 여러 해전에서 연승하였으며, 1593년(선조 26) 초대 삼도수군통제사에 올랐다. 1597년(선조 30) 임금 선조의 오해와 불신으로 파직, 투옥되어 사형의 위기에 처했으나, 정탁(鄭琢)이 이순신 장군의 목숨을 구하는 상소문과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감형되어 도원수 권율(權慄) 막하에서 백의종군하였다. 칠천량해전에서 원균(元均)이 참패하고 전사하자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세계해전사에 길이 빛나는 명량대첩을 이룩하였다. 그 후 힘겹게 수군을 재건하고, 1598년(선조 31) 내원한 명나라 수군과 연합작전으로 철군하는 일본군과 노량에서 결전을 벌여 대승을 거두었으나 적의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다. 사후 우의정으로 증직되고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 1등에 책훈되면서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1643년(인조 21) 충무(忠武)의 시호가 내려지고, 1793년(정조 17) 영의정으로 가증되었다. 무인이지만 문장에도 조예가 깊어 뛰어난 시문(詩文)과 국보로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난중일기(亂中日記)를 남겼다.

此讐若除 死卽無憾 (차수약제 사즉무감)
이 원수를 모조리 무찌를 수만 있다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겠나이다.
- 노량해전 직전 이순신의 기도문 (1598. 11. 18) -


호국성지 남해관음포

호국성지 남해관음포

고려는 몽골의 침입을 부처님의 힘으로 막아보려 했다. 그래서 시작된 것이 팔만대장경의 판각이었다. 해인사에 보관된 대장경판 중 종경록(宗鏡錄) 말미의 간기에 '정미세 고려국 분사남해대장도감 개판(丁未歲高麗國分司南海大藏都監開板)'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1247년 분사남해대장도감에서 판각했다는 경판 내에 지역명이 남겨진 유일한 기록이다. 그리고『고려사절요』「정안열전」에 정숙첨의 아들인 정안(鄭晏)이 남해에 퇴거하여 사재를 들여 대장경의 반 이상을 판각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남해 관음포만은 남해섬은 물론 지리산 등지에서 벌목해서 팔만대장경 판각용 목재를 3년 동안 바닷물에 담가 놓았다가 꺼내어 소금물로 경판을 삶은 후 그늘에 말리는 치목(治木)과정을 거친 곳이다. 치목이 끝난 후 인근 고현면 일대에 설치된 대장도감에서 대장경을 판각한 것이다. 불력으로 나라를 구하고자 한 호국불교의 상징인 대장경은 바로 관음포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1383년(우왕 9) 해도원수 정지(鄭地) 장군은 왜구가 120척의 배를 이끌고 쳐들어온다는 합포[마산]원수 유만수의 급보를 받고 나주와 목포에 주둔하고 있던 47척의 전선을 이끌고 관음포에 이르렀다. 정지 장군은 최무선이 만든 화포를 이용하여 주력전선 17척을 격파했다. 장군은"내가 일찍이 왜적을 많이 격파하였으나 오늘같이 쾌한 적은 없었다"고 말할 정도의 대승전이었다. 관음포해전은 최영의 홍산대첩, 나세의 진포대첩, 이성계의 황산대첩과 함께 고려말 왜구를 크게 무찌른 4대첩으로 불리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순신도 관음포에서 최후를 맞이하였다. 몽골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한 팔만대장경 판각, 관음포대첩, 그리고 노량해전에 이르는 호국의 깊은 뜻이 관음포의 긴 역사 속에 숨 쉬고 있다.


임진왜란

임진왜란

임진왜란 상황도

임진왜란 상황도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륙 정복이라는 야망 실현과 불안한 정치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조선을 침략하였다. 1592년(선조 25) 4월 14일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18,700명의 일본군이 부산포를 침공하면서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 사흘 만에 부산진과 동래성이 함락되었다. 연이어 가토 기요마사, 구로다 나가마사 등의 후속부대 약 14만 명이 조선을 침략하였다. 일본군은 부산에 상륙한지 20일 만에 한성[서울]을 점령하고, 이어서 평양 및 함경도 일대까지 진출하였다, 조선은 호남지방과 평안도를 제외한 전 국토를 일본군에게 유린당하며 풍전등화의 위기에 직면하였다.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의 함대가 옥포 앞바다에서 일본 함선 26척을 격파하면서 일본 수군의 예봉을 꺾었다. 그리고 한산도해전, 부산포해전 등의 승리로 해상권을 장악하며 일본군의 본국과의 보급로 및 연락망을 위협하였다. 육지에서는 전국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나 적의 후방 병참로를 공격하고, 명나라 군대의 내원으로 평양과 한성(서울)이 수복되었다.

1593년(선조 26)부터 명·일 사이에 강화협상이 진행되어 일부의 일본군만 조선에 잔류하고 대부분은 철수하였으나, 강화협상이 결렬되자 일본은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을 일으켰다. 조선은 칠천량해전의 패배 이후 전라도가 함락되어 위기를 맞았지만, 명량해전과 직산전투의 승리를 계기로 유리한 전황이 조성되어 일본군은 남해안으로 물러났다. 1598년(선조 31)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일본군의 철수가 시작되었고,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노량해전을 마지막으로 7년에 걸친 일본의 조선 침략전쟁이 끝났다.


옥포해전

옥포해전

임진왜란 최초의 승전고는 옥포에서 울렸다.
일본군의 북상과 일본 수군의 서진에 놀라 남해현 앞바다에 피신해 있던 경상우수사 원균은 전라도로 가는 해로(海路)의 목줄인 옥포의 중요성을 뒤늦게 깨닫고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음력 5월 6일 고성 당포에서 원균 함대와 합류한 이순신 장군은 5월 7일 연합함대의 총지휘관이 되어 부산 가덕도로 항진하던 중 척후장 김완이 거제 옥포에 정박 중인 일본 함선을 발견하였다. 선봉장 이운룡의 기습공격을 받은 일본군은 육지로 도망갔고 26척의 함선이 격파되었다.
옥포해전은 해전의 첫 승리이자 조선이 일본군과 싸운 최초의 승리였다.
이순신 장군은 이 전공으로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를 받았다.

勿令妄動 靜重如山 (물령망동 정중여산)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산처럼 침착하고 무겁게 행동하라.
- 옥포해전 직전 이순신의 호령 (1592. 5. 7) -

옥포해전 상황도

옥포해전 상황도

이순신의 첫 해전 승리이자, 조선 수군의 존재가 부각된 해전

  • 조선 수군 28척(판옥선)
  • 일본 수군 30여 척(대·중·소선)
  • 전과 : 일본 수군 26척 격파

한산도해전

한산도해전

학익진을 사용하여 남해안의 재해권을 장악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옥포에 이어 적진포, 당포, 당항포에서 일본군을 대파하였다. 수군을 통해 전라도의 곡창지대를 장악하려 했던 전략이 실패하자 육군이 전라도를 공격하여 후방을 교란시키고 수군도 총력전을 펴기로 하였다. 웅천에 있던 와키자카함대 73척, 구키함대 42척은 거제도와 통영 사이의 견내량을 통해 전라도로 진격할 예정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전선 48척을 이끌고 노량에 이르러 원균함대와 합류했다. 물길이 좁은 견내량은 판옥선을 많이 가진 조선 수군에게 불리한 지형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넓은 한산도 앞바다로 일본 수군을 유인하여 학익진으로 격파하여 남해안의 재해권을 장악, 일본 육군에게 가는 보급로를 차단하였다. 이 전투는 진주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의 3대첩으로 불리고 있다.

鶴翼列陣 一時齊進 (학익열진 일시제진)
학익진을 벌려서 일시에 모두 함께 진격하게 하였습니다.
- 이순신의 장계에서 (1592. 7. 15) -

한산도해전 상황도

한산도해전 상황도

최정예 일본 수군을 격멸하여 일본의 조선 정복 야욕을 좌절시킨 해전

  • 조선 수군 58척(판옥선, 거북선)
  • 일본 수군 73척(대·중·소선)
  • 전과 : 일본 수군 59척 격파

부산포해전

부산포해전

아끼던 부하 정운을 잃었지만 보급로를 완전히 차단한 대승이었다.

바다에서 연전연승을 거둔 이순신 장군은 일본군이 첫 상륙한 보급로의 핵심인 부산포를 공격하여 일본 육군에게 타격을 주고자 했다. 8월 29일 낙동강 하구를 거쳐 9월 1일 부산포로 향하던 중 다대포, 서평포, 절영도 등에서 적선 24척을 불태우고 부산포 앞바다에 이르렀다. 일본 전선 470여 척은 선창에 집결해 있고 병사들은 해안 산기슭에서 응전했다. 조선 수군은 장사진을 펼치며 종대로 부산진 포구 안으로 진입했다. 녹도만호 정운, 거북선 돌격대장 이언량 등이 선봉에 서서 적선 100여 척을 불태웠다. 이 전투에서 이순신 장군은 가장 아끼던 부하 정운을 잃었다. 전사자는 6명에 불과했다. 재해권을 완전히 장악당해 보급로가 차단되어 육지의 일본군이 조명연합군에게 밀리기 시작하였다.

水陸俱擊 庶可盡殲 (수륙구격 서가진섬)
수륙으로 함께 진격하여야만 섬멸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이순신의 장계에서 (1592. 9. 17) -

부산포해전 상황도

부산포해전 상황도

일본군의 본거지인 부산포를 공격한 임진년 최대 규모의 해전

  • 조선 수군 약 80척(판옥선, 거북선)
  • 일본 수군 470여 척(대·중·소선)
  • 전과 : 일본 수군 100여 척 격파

명량해전

명량해전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맘아 있사옵니다."

597년 원균이 칠천량해전에서 패하며 재해권은 완전히 일본군에게 넘어가고 조선 수군도 궤멸상태에 이르렀다.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이순신 장군은 전라도 해남과 진도 사이 명량[울돌목]의 소용돌이 조류와 지형을 이용하여 구루시마 수군을 공격하기로 했다. 13:130이라는 엄청난 열세 속에 누구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이순신 장군은 배수의 진을 치고 죽기를 각오하였다. 결과는 일본 전선은 30여 척이 격파되었고, 조선 수군의 전선은 단 한 척도 격파되지 않았다. 조류의 변화를 이용한 뛰어난 전술, 신기전, 비격진천뢰, 대장군전 등 함포전술, 빠른 조류에 강한 판옥선 등을 활용한 전투는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끄는 결정적인 전투였다.

必死則生 必生則死 (필사즉생 필생즉사)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다.
- 명량해전 하루 전 이순신의 훈시에서 (1597. 9. 15) -

명량해전 상황도

명량해전 상황도

조선 수군 13척이 일본 수군 133척을 물리쳐 정유재란의 위기를 반전시킨 해전

  • 조선 수군 13척(판옥선)
  • 일본 수군 133척(중선)
  • 전과 : 일본 수군 31척 격파

노량해전

노량해전

이순신 장군이 순국한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은 1598년(선조 31) 11월 19일에 남해 노량 앞바다에서 벌어진 임진왜란 최후의 전투이다. 이 해전에서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 수군은 일본 수군과 치열한 접전 끝에 대승리를 거두었다. 아무런 명분 없이 침략 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침략군의 철수를 유언으로 남기며 사망하였다. 이에 모든 일본군들이 순조롭게 철수하고 있었으나, 순천 왜교성(예교성)에 주둔하고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은 육지와 바다에서 조.명연합군의 포위를 당하여 위기에 직면하였다. 고니시의 구원 요청을 받은 남해와 사천의 일본군들은 대대적인 구원 함대를 편성하여 왜교성으로 진격하였다. 왜교성 앞바다를 차단하고 있던 조·명연합함대는 일본군 구원 함대를 격멸하기 위해 급히 노량 수로로 이동하였다. 이윽고 임진왜란 해전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해전은 19일 새벽 2시경부터 시작하여 정오 무렵에야 끝났다. 결과는 조·명연합함대가 일본 함선 2백여 척을 격멸한 대승리였다. 연합함대의 선봉군으로서 조선 수군의 적극적인 공격작전, 이순신 장군의 탁월한 지휘통솔과 함께 조.명수군의 화공전법으로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 수군도 통제사 이순신 장군과 가리포 첨사 이영남, 낙안 군수 방덕룡, 흥양 현감 고득장 등 여러 명의 장수들이 전사하고, 명나라 수군 부총병 등자룡도 전사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아침 동틀 무렵 맞이한 죽음의 순간에도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김으로써, 자신의 안위보다 전황을 걱정하는 위대한 장수로서의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노량해전은 조·명 연합작전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서, 임진왜란 동안 가장 큰 전과를 거둔 해전이었다. 노량해전의 종식과 더불어 7년간의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왔다.

戰方急 愼勿言我死 (전방급 신물언아사)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
- 노량해전 전장에서 (1598. 11. 19), 이순신 -

노량해전 상황도

노량해전 상황도

조·명 연합수군과 일본 수군간의 최후 결전으로 일본 침략군을 철저히 응징한 해전

  • 조선 수군 약 60여 척(판옥선)
  • 명 수군 약 500여 척
  • 일본 수군 약 300여 척
  • 전과 : 일본 수군 200여 척 격멸

공간형 각서

칼의 빛

칼의 빛

관람객이 입장하면 센서를 통해 조명, 음향이 켜지고 서서히 밝혀지는 장군의 검 위에 '생즉사 사즉생(生卽死 死卽生)'의 문구가 영상으로 맺혀진다. 죽음으로 삶을 구하고자 했던 각오는 군사적 열세에 있었던 부하 장병들의 사기를 충천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칼날을 휘두르는 싸늘한 음향이 공간 속에 퍼져 나오면 이순신 장군이 오직 나라와 백성만을 걱정했던 비장한 결의가 엿보인다.


진검 체험

진검 체험

이순신 장군이 사용하던 실제 검의 모형을 전시 체험하는 공간이다. 손잡이를 손으로 직접 잡을 수 있어 장군의 힘을 체험하도록 연출되었다.

이순신 장군의 검은 보물 제326호로 지정되었으며 아산 현충사에 보관되어 있다. 크기는 197.5㎝, 무게 5.3㎏으로 두 자루이며 검신에는 三尺誓天 山河動色, 一揮掃蕩 血染山河 (석 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가 떨고,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인다)라고 적혀 있다.


불멸의 이순신

불멸의 이순신

이순신 장군이 순국한 순간을 표현한 공간형 각서이다. 심장을 상징하는 박스 안에 갑옷을 뚫고 들어온 총탄을 모형으로 연출한 공간이다. 1598년 음력 11월 19일 아침, 노량해전이 막바지에 이를 즈음 일본군이 쏜 총탄이 장군의 왼쪽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이순신 장군은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송희립은 조카 완이 곡하려 하자 말리고 장군의 시신을 수습한 후 계속 북을 치면서 독려하였다. 전투가 끝난 후 장군의 죽음이 알려지자 군사들이 모두 통곡하였다. 명수군 제독 진린은 "이순신은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주가 있고, 보천욕일(補天浴日)의 위대한 공이 있다"며 찬양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순국하였지만 그의 호국정신은 지금도 남아 있다.


조·명연합

조·명연합

조·명연합

조·명 연합작전으로 승리로 이끈 노량해전 영상을 관람하는 공간형 각서이다. 칠천량해전의 패배와 명량해전에서는 승리했지만 조선 수군의 전력은 많이 약화되어 있었다. 진린제독을 중심으로 하는 명나라의 구원병을 통해 전열을 가다듬은 조선 수군은 명나라 수군과 연합군을 형성하고 함께 조·명 연합작전을 펼쳐 노량해전을 큰 승리로 이끌었다. 이 해전을 끝으로 7년간의 임진왜란은 종식되었다.

장량상동정마애비(張良相東征磨崖碑)

불멸의 이순신

이순신 장군이 순국한 순간을 표현한 공간형 각서이다. 심장을 상징하는 박스 안에 갑옷을 뚫고 들어온 총탄을 모형으로 연출한 공간이다. 1598년 음력 11월 19일 아침, 노량해전이 막바지에 이를 즈음 일본군이 쏜 총탄이 장군의 왼쪽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이순신 장군은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송희립은 조카 완이 곡하려 하자 말리고 장군의 시신을 수습한 후 계속 북을 치면서 독려하였다. 전투가 끝난 후 장군의 죽음이 알려지자 군사들이 모두 통곡하였다. 명수군 제독 진린은 "이순신은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주가 있고, 보천욕일(補天浴日)의 위대한 공이 있다"며 찬양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순국하였지만 그의 호국정신은 지금도 남아 있다.

정왜기공도병(征倭紀功圖屛)

정왜기공도병(征倭紀功圖屛)

정유재란 당시 순천 왜교성 전투와 노량해전 등의 장면을 그린 '정왜기공도병(征倭紀功圖屛)'의 뒷부분이다. 정왜기공도병은 명나라 종군 화가가 그린 '정왜기공도권(征倭紀功圖卷)'을 19세기에 6폭짜리 병풍 2개에 다시 그린 것으로, 앞부분 병풍은 현재 스웨덴 동아시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2012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영국에서 뒷부분 병풍만 사들여 소장하고 있다.

임진왜란 마지막 해인 1598년 순천 왜교성전투, 노량해전 등에서 조·명연합군이 일본군을 물리친 것을 기념하여 그린 것으로, 병풍 그림은 화면의 오른쪽부터 왼쪽으로 시간·공간 순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조·명연합군은 노량수로와 관음포에서 일본군 전선 300여 척 중 200여 척을 분멸하였다. 노량해전에서 살아남은 일본군 패잔병이 퇴각한 남해왜성을 소탕, 정벌한 전투장면이다.

  • 종이 채색, 155.5㎝×356㎝(화면)
  • 174㎝×374㎝(전체), 소장: 국립중앙박물관

터널형 각서

승전

승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통틀어 대표적인 해전에서 23전 23승 모든 전투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 장군의 위엄을 표현한 공간형 각서이다. 세부적인 해전까지 포함하면 45전에서 단 한 차례도 패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은 육상전투에서의 거듭된 패전 속에서도 남해안 일대의 제해권을 장악함으로써 일본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후방을 교란시키면서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지키며 전세를 역전시켜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나라를 지켜냈다.

"싸우기 전에 이긴다"라는 충무공의 말처럼 사전에 대비하고 철저하게 전술을 준비하여 불가능해 보이는 수많은 전투를 승전으로 이끈 이순신 장군의 위대함을 보여주고 있다. 장군은 패할 수 있는 상황에서의 전투를 이길 수 있는 조건으로 창조적으로 변화시킴으로써 승전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가는 연금술사였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삼국평화의 터널

삼국평화의 터널

"명(明)을 정벌하고자 하니 조선은 길을 빌려 달라."

정명가도(征明假道)를 명분으로 일본의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조선을 압박했다. 중국을 정벌하고 천하통일을 꿈꾸는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생각을 모를 리 없는 조선은 부자관계와 같았던 명나라를 일본이 침략하는 것에 동조할 수는 없었다. 결국 1592년 일본은 조선을 발판으로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전쟁 준비가 되지 않았던 조선은 연전연패를 거듭하면서 20일만에 한양을 일본군에게 넘겨주고 선조는 평양을 거쳐 의주로 몽진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조선에는 이순신 장군이 있었고 곽재우, 김천일 등 의병장들을 중심으로 하는 피끓는 백성들이 있었다. 그리고 명나라 이여송의 4만의 병력이 원군으로 온 후 평양성을 탈환하고 행주산성에서 권율에게 대패하면서 일본군은 한양을 포기하고 남하하고 말았다.

1598년 11월 19일 조·명연합군과 일본군의 마지막 전투는 3국이 함께 싸운 국제전이었다. 결과야 어찌되었던 3국의 장수들과 군사들은 추운 겨울바다에 잠기고 말았다. 터널형 각서공간인 '삼국 평화의 터널'은 전시공간 내부에 삼국 수군을 대표하는 모형을 일렬로 도열시켜 삼국평화를 연출하고 있다.

임진왜란을 끝으로 일본은 300년 동안 조선을 넘보지 못했다. 하지만 100여 년 전 일본은 대한제국은 물론 중국까지도 손아귀에 넣었고 1941년에는 미국 진주만을 습격하면서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는 도발을 감행하였다. 하지만 1945년 8월 15일 연합국에 항복선언을 하면서 전쟁은 종식되었다. 이순신 순국공원에 삼국 평화의 터널을 만든 것은 다시는 일본제국주의가 부활하지 않고 평화로운 미래를 만들자는 의지를 담은 것이다.

담당부서 :
관광진흥과 관광시설팀( 055-860-8651)
최종수정일 :
2021.10.13 13:58:23
만족도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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